제가 정말 좋아하는, 시인 정호승 님의 구절입니다.

누군가의 가치관은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에서 드러난다고들 해요. 님, 님이 가장 싫어하는 건 무엇일까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월감에 잔뜩 취해있는 회사 대리 , 눈치는 없는데 쓸데없이 자존감만 높은 친구.. 다 별로지만요. 저는 무엇보다 그늘이 없는- 그늘이 없어 그것을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티 없는 맑음이란 어린아이에게 있을때에야 아름답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의 성숙은 으레 요구되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성숙은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세상에는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 어둡고 깊은 심연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성숙한다. 그것은 차마 활자로서 물화되지 못할 어떤 종류의 서글픔- 그것을 묵묵히 끌어안는 과정이라고 믿어요. 

티 없는 순수는 종종 종횡무진한 폭력으로 휘둘러지곤 합니다. 악의가 풍기는 몸짓은 결국 결핍에서 비롯했다는 점에서, 이해와 용서의 여지가 있지만요. 별다른 의도가- 관심이- 없는 무심은 사람들의 그늘을 세상에서 지워버립니다.

그런 연유로 저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요.

오늘 책곳간에서 방출할 책은 누군가의 그늘을 비추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가려지고 지워져 버린 공동체의 가장 내밀한 속살- 그것을 드러내어 위해, 그러해서 성숙하기 위해 책은 쓰이고 찍히고 진열해, 끝끝내 읽혔습니다. 

제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로 매일 밤을 견디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매일 찾아오는 깡패와 빚쟁이들의 발소리에 웅크려야 했던 그 친구를 위해, 독립 출판 프로젝트 팀 '원트'는 책을 만들기로 했대요.

이 책에 참여한 7명의 저자는 보호 종료 아동*입니다. 어제 / 오늘 / 내일이라는 키워드 밑에서 이들은 글을 썻습니다. 언젠가 꿨던 꿈과 별다를 것 없는 하루, 취향, 사랑, 혹은 잊을 수 없는 사건에 대해서, 오직 그것들을 두 팔 벌려 끌어안기 위해서.

그런 하루였습니다.

선선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늦은 오후, 아마 하교하는 학생들이 조용한 골목을 떠들썩하게 지나던 때였겠죠. 어느 눅진한 작은 방이었습니다. 취한 남자의 손을 떠난 델몬트 병은 선명하게 반짝이며 화장대로 날아들었고요. 산산조각이 난 유리 조각을 들고있는 여자의 손에서는 옹골찬 핏방울이 뚝뚝 흘렀습니다. 아이는 그 난장의 구석에 덩어리처럼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오가는 고성이 아득해질 때쯤 아이는 문득 핏방울의 선명한 선형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더럽고도 아름다운 모순(52p) 같은 하루

어린 짐승의 버티는 하루

님, 오늘도 그런 하루였습니다. 

이 중에도 웃는 아이들이 있다. 이 시궁창 속에서도 볕은 들 듯이,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 말하는 순수하고 불쌍한 아이들이 있다.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어느 한 극작가의 배부른 투정이 괜히 슬퍼지는 아침이다.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사랑은 왜 하는가, 사람은 왜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솔빈 님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그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늘을 가지지 않고서야 왜 같은 말은 좀처럼 튀어 나오지가 않거든요.

우리가 게임 같은 것을 할 때 잘 보면요. 잘 풀리는 쪽은 대개 꼼짝 않고 아무 소리 하지 않습니다. 항상 먼저 소리를 내는 건 잘 풀리지 않는 쪽입니다.

이 게임은 룰이 왜 이러냐, 잘못된 거 아니냐, 뭐가 고장 난 것 아니냐, 더 나아가 도대체 이런 걸 왜 해야되냐. 억울하거든요. 

그런데요. 제 생각에 삶이라는 것은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생동하는 것은 그것에 저항하는 무엇이 있는 곳에서 감각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 있는 곳으로부터, 삶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러니까요, 우리 아무리 억울하더라도..

살아요.

이전에 책곳간에서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 경의선 책거리에 위치한 도시 인문학 서점입니다. 원래는 방문할 예정인 서점이 따로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친구 따라 책방 연희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책을 살 생각도 없었는데요, 구경하다 보니 읽어보고 싶은 책을 발견해버렸습니다. 그런데, 한번 눈에 들어온 책은 사야겠어서요. 해서 원래 방문할 예정이던 새로운 독립서점은 부득이하게, 다음 주에 소개시켜드려야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죠😀?

프랑스 문학의 거인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입니다. 참고로,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는 동일 인물입니다. 

로맹 가리는 자기의 실제 나이보다 많은 나이를 살고 있는 열네 살 모모의 눈을 통해 이해되지 않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너무 일찍 세상으로 내던져진 소년에게 세상은 곧 불안이었습니다. 미처 여물지 못한 몸은 폭력조차 행사할 수 없어서, 주어진 하루를 견디기 위해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도둑질뿐이었죠. 그렇게 동네 소매치기로 살아가던 모모는, 마치 돌부리에 걸리듯 화류계 출신 유대인 할머니 로자를 만나게 되는데..

사실, 이번 주 내내 책곳간 원고를 붙들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방출하는 책 자체도 무겁다면 무거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것보다도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 대한 단락을 넣을까 말까 판단이 서지 않았거든요.

지금껏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이만큼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는 영화는 보기 드문 것 같습니다. 

물론 잔인하리만치 비극으로 점철된 마츠코의 일생이, 그리고 비눗방울처럼 명랑한 고통의 연출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불쾌(?)하게 다가올 수 있겠습니다.

관객의 모든 취향은 존중돼야겠으나, 그럼에도 말해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츠코의 그 모든 비극과 절망, 고통과 부패의 역사가 존재해야 할 이유입니다.

누군가는 이런 영화가 왜 만들어져야 하고, 왜 보여져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지만요, 마츠코의 이야기는 일종의 공식으로 기능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불편하고 예쁘지 않고, 불쾌하고 신경질 나지만 그런 삶도 있다는 것을- 세상의 어떤 부분은 가려지고 지워져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조치되지만, 그러나 분명히 어딘가에는 그런 삶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복기하고, 각인하는 공식으로요.

혐오스러운 어떤 것도 시초에는 사랑스러운 이름과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보여져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님, 오늘의 레터, 어땠나요?